일상,그 단조로운 소묘

도토리 묵을 만들며 2003-10-24

binjaree 2009. 6. 19. 12:29




맨 처음 이렇게 쓰고 떫은 작은 열매를 가지고 거기서 녹말을 뽑아내 묵이란걸 생각해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지금이야 그냥 별미로 어쩌다 한번 맛보게 되는거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 음식은 우리나라에만 있을것같고(혹 중국에도 있으려나?)양식이 부족해 온갖 열매며 풀뿌리,심지어는 나무껍질까지도 식량으로 삼아야했던 어느 옛 사람에게서 처음 만들어졌겠죠

도토리를 주워 와 손바닥만한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살을 쫒아가며 채반에 널어 말리고,
열매 하나 하나를 일일히 겉껍질을 벗기고,
말린 열매를 물에 담궈 쓴맛을 우려내고,
다시 그 열매를 몇번으로 나눠 믹서에 곱게 갈고,
갈아진 걸쭉한것을 베주머니에 넣어 앙금을 걸러내고,
그 앙금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농도를 맞춰가며 아프도록 팔을 저어 묵을 쒔습니다
믹서를 이용한거 말고는 완전 재래식 이 작업을 진행 하노라니 내가 제법 살림꾼같아 흐뭇하고 묵 몇점을 맛보며 즐거워할 가족들 생각에 행복합니다

김장도 담아 마당가에 묻어보고,메주를 직접 쑤어 된장도 담궈보고,삶은 빨래를 빨랫돌 위에서 방망이로 두드리며 빨아 보고싶단 작은꿈을 갖고있는 난 이 발빠르게 변모해 현기증나는 시대하곤 안맞는 사람같습니다
시대란 시간적 배경말고도 아파트란 이 공간적 배경도 안맞는군요
햇살좋은 앞마당커녕 작은소음 내는것도 신경을 써야할 층층이 포개진 공간안에 있으니..
이렇게 시간과 공간,그 어울리지 않는 배경안에서 오늘도 스산스런 가을날을 보냅니다

그러다 문득,
작은 양푼 두개에 담겨져 식어가는 묵을 바라 보자니 잊혀졌던 옛일 하나가 떠오릅니다 중학교 이학년 수학여행때였죠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기울어가는 가세때문에 맏딸이었던 전 어머니의 주머니 사정을 늘 생각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 집을 떠나는 장거리 여행 기회였는데 수업도 없는 수학여행이야 안가면 어떠랴싶어 여행 신청을 안했었지요 그 여행비가 부담스러워...
여행 전 날, 절 따로 교무실로 부르신 담임선생님께선
"네 어머니는 수학여행을 가지말라고 하실분이 아니다 네가 말씀 안드렸지?.......
그래도 괜찮으니 내일 아침 아무 준비없어도 되니 늦지말고 꼭 와야한다" 고 말씀하시더군요
하지만 어린마음에도 여행비 안 낸 그 여행을 선생님의 배려로 따라 나설순 없었습니다

그 무렵 엄마는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보태보려고 도토리를 주워 묵을 만들어 큰 함지박에 이고 동네로 장사를 다니셨어요
엄마는 딸의 수학여행을 모르진 않으셨을텐데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저도 명랑을 가장한 채

 "그깟 여행 안가도 괜찮아 공부하고는 상관도 없는데 뭘, 내일 엄마 도토리 줍는거나 도와줄께" 라며 억지 너스레를 떨었었지요

그 다음날 엄마를 따라 나섰는데 학교에 있을 그 시간에 학교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하남시(그때는 광주군 동부면 신장리였던...)를 지나 광주초입 어느 산 모퉁이에서 내렸었지요
버스가 떠난 빈 도로....
주변 낯선 산들은 가을이서 그랬는지 더더욱 스산했었고
지금쯤이면 재잘거리며 속리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을 친구들 모습이 떠올라 한순간 가슴이 먹먹해 졌었습니다
가을색 깊어가는 산 아래,굽어져 사라지던 휑하니 빈 도로를 바라보며 느꼈던 그 막막함은 어제인양 지금도 선 합니다
무거운 함지를 이고 차마 입에서 묵을 사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아 골목을 서성였을 가여운 내 어머니의 젊은날도...

지금 고덕동에 살고있는 친구 M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와 문장대 오름길에서 너무 예뻐 주워왔다며 내 손에 잘생긴 도토리 서너알을 내밀었었죠(그 애는 울엄마가 묵을 팔러다니신걸 몰랐었지요)
그리고 네가 안가면 자기도 안간다며 나 때문에 수학여행을 포기한 그 때 내 짝궁 Y...
그 친구는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군에간 아들이 첫 휴가를 받아 돌아온다고 쑤어놓은 묵이지만,
그리고 이제는 잊혀져도 될, 까마득 30여년전 옛 이야기지만,
그 친구들이 가까이 살고 있으면
내가 만든 저 묵을 나눠 먹으며
기억마저도 희미할 그 시절의 조각들을 꺼내 놓으며
'그 때는 그랬었더란다' 라며 단발머리 풋내기시절을 반추해 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