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그 단조로운 소묘

오래 기억에 남을 여름의 흔적(2003)

binjaree 2009. 6. 22. 09:58

   별로 나서고 싶지않은 휴가길이어서 이리저리 핑계대며 미적이다 남편의 채근을 뿌리칠 방법이없어 겨우 하루전에 장보고 준비해 떠난 길이었습니다

해안선일주를 하자길래 몇군데 가보고 싶은곳을 찾아 놓고 지도한권 챙겨두고...

명색이 가이드라 나머지 5명의 취향을 고려해야 했으나 그냥 나를 따르라 식의 내 가고픈곳만 체크해 두고....^^

8월10일 오전9시 짐을 싣고 일행집들을 돌며 태우고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 8월10일 일요일 맑음 전남 무안 회산지 

8월14일부터 백련축제가 시작된다길래 지나는길에 들러가기로 했죠 어짜피 서해안고속 도로 종착지인 목포가 코앞인 곳이니...

14일 축제가 시작되어도 사나흘전이면 어느정도 연꽃이 피었을거라 생각했는데 꽃이 이외로 없었습니다

필 봉오리조차도 몇개 눈에 안뜨이더군요 한바퀴 돌아 다시 길을 재촉..

 

 

 

* 전남 강진 다산초당

정약용선생의 흔적을 돌아보고...다방면으로 출중하셨던 다산선생은 천재였구나란 생각이 듬^^ 

 

 

 

 * 전남 고흥 도양면 녹동항구 

순전히 생선회값이 싸다는 이유로 들어선 곳 알다시피 고흥은 반도라 땅 끝 소록도가 코앞인 녹동항구 가는 길은 엄청 지루했었죠

날은 저물고... 파장인 어시장에서 5만원어치 횟감을 샀는데 6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남아 찌게에 넣었네요

근처 민박집에서 하룻밤 묵고...(광주분이라는 주인아주머니는 후덕해보이고 친절했었고....)

새벽부터 시작된 장대비에 어디로 길을 잡아야할지 난감했었는데 아침을 지어먹고나니 그치더군요

남자들이 밥을 다 해놓고 깨워 우린 그 날부터 놀고 먹었죠^^*

 

*8월11일 월요일 보성차밭 

온 길을 되돌려 보성 대한다원 차밭으로 향했습니다

삼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입구도 참 좋았고 TV에서 늘 보던 그 차밭을 구경했죠

찻잎을 따낼일이 깜깜하더군요 그 넓은곳을 어찌 가꾸는지...

우전이란 녹차를 조금 샀습니다 곡우전에 따서 덖은 향기 깊은 차라네요 제 싸구려 입이 그 깊이를 느낄수 있으려는지..

 

 

 

 *순천 낙안읍성

잔디가 아주 잘 가꿔진 민속촌 같은곳이었죠

녹차칼국수를 먹었는데 우리동네는 칼국수에 겉절이가 따라 나오는게 거의 전부인데 몇가지 나물이 칼국수에 따라 나오더군요

흔한 재료인데도 어쩜 그리 맛깔스럽고 깔끔한지.. 일행모두 역시 남도땅이야 감탄을 했어요

친절한 주인아주머니께 밥도 한그릇 공짜로 얻어 나물넣고 비빔밥도 만들어 먹었죠^^

읍성이 자리한곳은 분지처럼 보이는 아주 평화스런 동네였어요

 

 

 

 

 

 

*순천 송광사(퍼온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松光面) 조계산(曹溪山) 서쪽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창건시기 : 신라 말기 창건자 : 혜린(慧璘)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지(松廣寺誌)》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

처음에 이렇게 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석조(釋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승려 수우(守愚)가 사우(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이 사찰을 안고 있는 조계산은 이 때까지는 송광산이라고 했는데, 보조국사 이후 조계종의 중흥도량(中興道場)이 되면서부터 조계산이라고 고쳐 불렀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총칭으로, 고려 숙종(肅宗) 2년(1097)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天台宗)과 구별해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그 뒤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경내에는 이들 16 국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국사전(國師殿)이 따로 있다.

수선사를 언제 송광사로 개칭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뒤 한동안 폐사 상태였는데, 뒤에 응선(應禪)을 비롯한 승려들이 복원하고 부휴(浮休)를 모셔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삼존불(三尊佛)·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금기(金器)·대종(大鐘) 및 기타 보물과 《화엄경(華嚴經)》 장판(藏板) 약간만을 건졌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설월(雪月)·율암(栗庵)이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승려와 신도의 노력으로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48년의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그후 승려 취봉(翠峰)·금당(錦堂)의 노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이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계산 내 암자로는 광원암(廣遠庵)·천자암(天子庵)·감로암(甘露庵)·부도암(浮屠庵)·불일암(佛日庵)·판와암(板瓦庵)과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 및 탑전(塔殿:寂光殿) 등이 있고, 56개의 말사와 수련원·성보보수교습원 등의 부설기관이 있다.

또 가장 많은 사찰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국보 42),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43), 국사전(國師殿:국보 56)을 비롯해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보물 90), 경질(經帙:보물 134), 경패(經牌:보물 175), 금동요령(金銅搖鈴:보물 179),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 삼현원찬과문(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보물 204),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205),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206), 《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보물 207), 하사당(下舍堂:보물 263), 약사전(藥師殿:보물 302), 영산전(靈山殿:보물 303), 《고려문서》 즉 노비첩(奴婢帖),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보물 572)가 있다.

이 밖에도 능견난사(能見難思) 등 지방문화재 8점이 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첩(書帖), 영조(英祖)의 어필(御筆), 흥선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많은 문화재가 사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선수행(禪修行)의 도량이며,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있는 곳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에 있다.

 

 

 

 

 

  이곳을 한번 다녀간 일행분의 말로는 새벽 예불때 오면 스님들의 독경이 한목소리처럼 울리는게 장관이라던데 그 광경을 볼 기회를 놓쳐 아쉬웠죠

 대사찰답게 웅장하고 스님들도 많이 계셨죠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발길을 돌림 언제 기회가 되면 송광사를 들러 조계산등산을 하고 선암사까지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구요

 

 

*남해 충렬사

충무공을 모신 사당으로 남해대교 건너 노량해변으로 있습니다

충무공 전몰유허비와 돌아가신후 시신을 처음 육지로 모신곳이라는 관음포를 돌아 내려왔습니다

얼마전 읽은 칼의 노래가 생각나더군요 전쟁의 참화앞에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 그려진...

충무공영전앞에선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풍전등화같은 나라의 운명을 지키보려다 돌아가신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님의 그 높은 지혜와 용기가 지금 나라를 지키러 떠난 제 아들에게도 전해져 늠름한 젊은이로 다시 태어나게 도와주세요 장군님 고맙습니다"*^^*

 

 

 

 

 

 *경남 남해군 남면 가천 다랭이마을

어두워지는 해안을 따라 삼천포(사천)를 향해가며 남면 해안관광도로와 다랭이마을을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이 나라 남해안이 리아스식 해안이란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반도가 이리 넓고 긴지는 몰랐는데 정말 멀더군요

물론 남해는 남해대교로 육지와 이어진 섬이지만...

섬이란 생각이 전혀들지않게 높은 산들이 주위를 둘렀고 바다에는 다도해란 지명만큼 올망졸망 섬들이 떠 있었죠

빡빡한 일정에 지친 일행들이 삼천포까지 가지말고 그냥 적당한곳에 민박을 얻자고해서 찾아 들어간 곳이 다랭이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 로 내려서는 길이 얼마나 아찔한지...

차한대가 겨우 지날만한 내리막길인데 바로옆은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이었습니다 해가 지길래 포기한곳이 찾아들간곳이라니....이런 행운이...

다랭이 두레방이란 간판이 걸린곳에 나와 계시던 할머니께 민박집을 물으니 자기집으로 가자시며 앞장을 서셨죠

여자들이 샤워를 하고 속옷을 빠는사이 남자들이 저녁을 준비했는데 양념등을 챙겨주셨어요

저녁을 먹고 두분이 마늘씨 고르는 일을 하고 계시길래 둘러앉아 돕고 옛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파도가 거칠어 선착장 하나를 만들수 없는 곳이라 바닷가 마을인데도 배가 한척도 없다는것과 가파른 다랭이논은 태풍이 오면 바닷물이 날라와 한해 농사를 망치기 일수였다더군요 산에 나무들까지 죽을정도로...

삿갓배미란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한농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다 논을 세었는데 한배미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더군요

찾다 찾다 못찾고 포기하고 돌아서려고 벗어놓은 삿갓을 집어들었는데 그 삿갓안에 한배미가 숨어있었다죠

그만큼 좁은 논들이 층계를 이루고 있는곳이었요

비탈진 돌밭을 한뼘이라도 더 일구며 허기진배를 안고 살고지던 가슴이 싸아해지는 동네였습니다

평생 갇혀산다시던 두분은 세월이 주는 연륜으로 깊이있고 다정다감한 분이셨어요

마늘고르며 수고했다고 세집똑같이 마늘을 한봉지씩 싸주시며 집에 도착하면 전화 하라며 여행객들의 안전까지도 염려해주시는..

약주를 즐기신다길래 남편은 할아버지께 술을 받아드리고 할머니께는 준비해간 찬을 나눠드리고 돌아섰는데 두메산골 친정집을 떠나듯 섭섭했습니다

이른 아침 마을 앞 바다위를 멸치잡이 선단이 지나가는데 제일 앞 연기를 뿜어내는 배는 잡은 멸치를 삶는 배라더군요

가끔 바라보며 낭만적인 풍경만을 그리던 바다가 그 곳에선 왜 그리 비장하게 느껴지던지...

우리가 바라보는 바다는 그들에겐 생명을 이어가는 삶의 터전으로 느껴졌기에 그랬던건지....

집에 돌아와 전화를 드렸는데 잘 도착했느냐고 반갑게 받으시더군요 두분의 건강을 빕니다 

 

 

*8월12일 화요일 거제해금강과 외도 

 남면 다랭이 마을 떠나 거제도로 향했습니다

남해도옆 창선도로는 창선대교라는 다리로 이어져 있어 우리가 섬을 지나친다는 감이 안왔구요

올망졸망 섬들에 걸쳐진 연육교로 인해 그냥 육지 어느곳을 지나는것 같았죠

곳곳에 죽방렴이 설치되있어 바다구나란 생각이 들 정도였죠

사천(삼천포)을 지나 고성쪽으로 접어드니 더더욱 산중이라 남해안을 가는게 아니고 강원도 어느곳을 지나고 있는것 같았습니다

구비구비 지방도로를 따라 고성읍엘 당도하고 그곳을 지나쳐 통영으로 접어 들었습니다

어느쯤엔가 청마 생가 안내판을 보았는데 일행 아무도 그곳을 원하지 않더군요

(하긴 울남편은 청마가 누군데 했었지요ㅡ.ㅡ;; 잘난체가 특기인 제가 깃발을 읊어주었죠)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애수는 백로처럼 나래를 펴다.....근데 맞나? ㅎㅎㅎ^^*

거제대교를 건너 거제도로 접어 들었습니다

그곳이 고향인 전직대통령의 고향방문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길을 돌아 거제도를 달렸는데 아무리 이 나라 두번째 섬이라지만 가도 가도 해금강은 안나오니 이곳도 참 징하게 넓더군요 ㅎㅎ

 

학동해수욕장에서 유람선을 탈 수 있다기에 그리로 갔거든요

주차를 하고 유람선 시간표를 알아보니 4시이후에나 배를 탈 수 있다길래(이전것은 매진) 갈곶쪽으로 발길을 돌렸죠

그런데 10분이나 주차를 했나 종일 주차료로 5천원을 낸건데 안돌려주더군요

쌈닭(?)인 울남편이 나섰는데도 못돌려받고 관광지의 불친절에 기분상한채 그 곳을 떠났죠

다행이 갈곶에는 2시에 출항하는 배가 있었어요

이응경이 드라마인지 영화인지를 찍고 있었는데 정말 이쁘더군요^^

 

불친절은 이곳도 마찬가지...

점심을 먹었는데 물도 물수건도 우리가 가져오고 쥔장은 밥만 불쑥 가져다준채 안뵈더군요 그래놓고도 카드는 안받고 현금달라대요

암튼 시간이 되서 유람선을 탔는데 무섭기커녕 신나더라구요

뱃전에서 튕기는 바닷물이 얼마나 시원한지,또 바람도... 해금강은 절경이었어요

십자동굴이라나 그리로 배가 들어갔다 후진해 나오는데 뱃전이 바위에 닿으며 나오더군요 배가 깨질까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ㅎㅎ

배는 해금강을 후딱돌고 외도로 향했는데 그 바다위에 배가 다 유람선이었어요 출항한곳은 다르지만 코스는 같은....  

 

 

 

 

 

 

 

 

 

 전직교사부부가 오랜세월 가꾸었다는 그 섬은 작고 천혜의 경관을 지닌 섬이었지만 인공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지요

입장료가 5천원인데 3천원만 해도 될것같은...

그냥 먼 곳 까지 갔으니 한번은 들러 볼만한 곳이었지요 아 참! 겨울연가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그 작고 이쁜집도 구경했어요

서둘러 발길을 돌려 마산을 거치고 김해를 지나고 경주를 들러 포항 영일만 민박집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넘어있었죠

연이틀을 잠을 설친탓인지 그 날은 잘 잤는데 남자 셋은 세번째날 밤도 즐거운오락(?)을 하느라 잠은 두서너시간 잔게 다라더군요

그러고도 이천여키로를 운행한 기사분께 정말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이구~~ 징한 인간ㅋㅋㅋ

 

*경북포항 대보면 호미곶 일출맞이 공원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도(깨끗한데..)휴가철이 지나니 손님도 없고 값도 쌌습니다

고흥에서만 방 두개에 6만원을 지불했고 남해와 포항에선 5만원밖에 안들었지요 큰방 두개에...

샤워시설과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집안에 물론있고요 주인아주머니께 일출시간을 알아두고는 잠을 잤는데 남자들이 안깨웠으면 그냥 잘뻔했었죠

너무 졸려워 에이~해야 매일 뜨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왕 일어난거 세수도 안한채 입고 잔 옷위에 점퍼 하나만을 걸친채 호미곶으로 향했습니다

가는길 하늘빛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핑크빛으로 구름이 젖어있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죠

속초에서도 태백산에서도 일출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 날은 참 환상적인 색이었었죠

 

 

 

 

 

숙소로 돌아와 밥은 가다 먹기로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 유명한 포철 담장을 돌고 포항을 떠나며 내가 아는 이름들이 떠 올랐습니다 마리이와 미수님 포항에 살고있는 내가 아는 두사람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백암온천으로 행했죠 그 유명한 7번 국도를 따라서... 

백암온천에서 묵은때 벗기고 울진 성류굴로 출발...

살아있는 지구를 보여주는 종유석과 석순들 기기묘묘한 형상들은 아름답기보다는 무서웠죠

임진왜란때 그리로 피했던 오백여명의 백성이 왜군이 입구를 막아 모두 아사하고 말았다는 기막힌 사연이 있는곳..

그래서 더더욱 무서웠습니다

불영계곡을 지나 봉화,영주로 길을 잡았는데 우리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할 부석사가 기억나더군요

가보고 싶었던곳이라 일행들의 의견을 물으니 모두 찬성...

부석사로 가는 내내 가벼운 흥분이 일고 이 시점에서 그곳을 기억해낸 내 둔한 머리가 기특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8월13일 경북 영주 부석사

성류귤을 떠나 울진에서 불영계곡으로 접어 들었습니다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불리는 곳, 긴 협곡이 시작되었고 몇해전 지날때 산멀미까지 느꼈던 첩첩산중으로의 길로 접어든거죠

구불 구불 돌아가는 길에선 늘 멀미가 나곤 하는데 그날도 예외는 없어 껌을 씹으며 견뎌냈었죠

통고산 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고 기암괴석이 솟구친 불영사도 지났지만 그 협곡은 너무 깊어 차에선 볼 수가 없는게 아쉬웠습니다

 

 봉화 어느 쯤에선가 밥을 먹었는데 3년된 김치가 나오더군요(포장판매도 했어요)

양념을 별로 넣지 않고 버무려 묵힌건데 시기가 짝이 없었지만 뒷맛은 아주 개운해 한접시를 거의 비웠죠^^

집에선 매끼 챙겨먹기가 쉽지 않은데 여행내내 끼니마다 제데로 챙겨먹으니 몸은 갈수록 둔해지더군요(하긴 일행들이 예전보다 살이 많이 붙었다네요ㅡ.ㅡ;;)

봉화에서 부석사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사과의 고장답게 곳곳에 사과밭이 즐비하고 열매는 늦여름 따가운 햇살에 몸을 맡긴 채 여물어가고 있었죠

은행나무가 줄줄이 서 있는 부석사로의 길은 가을이 깊어지면 더없이 좋을 길이었어요

소백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당연히 소백산 부석사라고 여겼는데 봉황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더군요(입구는 태백산 부석사라고 걸려있었고...)

지금처럼 대간이나 정맥이란 산줄기 개념이 널리 통용되지 않을때 이곳이소백과 태백으로 갈래가 나뉘던 곳이라는군요

유홍준교수 말대로 은행나무길 너머론 예의 사과밭이 있었고.... 여름을 걸으면서 깊은 가을만을 생각합니다 

 

무량수전과 그 앞 안양루

몇개의 돌계단을 올라 무량수전앞에 섰습니다 그 감격적인 조망이라니....

높지도 않을 듯 싶은 이 자리에서 그렇게 많은 능선들을 바라볼수 있다는게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무량수전 앞 뜰 돌축가에 서서 트인 조망에 넋을 빼앗겨 다른곳은 제데로 둘러보지도 못했습니다^^

고건축에 대해 아는거라곤 들은대로 기둥의 중간이 배가 불러 있으면 배흘림기둥이구나 라는 정도니...ㅡ.ㅡ;;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의 건물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는게 실감이 안날 정도로..

 

그 앞 안양루는 단청이 거의 지워져 없고 마루는 오랜 세월은 견딘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이 자리에 어쩜 이렇게 딱 이 위치에 절을 세울줄 알았던 의상대사님의 안목이라니..

조계종이 화엄종이 무언지도 모르는 제 무식이 답답할 따름이었습니다

송광사는 조계종의 본산이고 부석사는 화엄종에 속한 절이었지요

 

최순우님이 유홍준님이 사무치는 마음으로까지 표현한 이 자리에서 나도 그 사무치는 마음의 끝자락이라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늦가을... 비라도 슬며시 내려 더더욱 한기가 느껴지는 스산한 날,

젖은 은행잎을 밟으며 올라 이 자리에서 멀어져 가는 저 산줄기들을 바라 보며는 그 사무치는 마음의 한조각이라도 접할 수 있으려는지요..

 

안양루에 걸려 있는 중수기랍니다

몇몇 글들이 걸려 있는것을 보았지만 글자해독이 거의 불가능할것처럼 보이는 낡은것도 있었고 제가 어디 그 한문을 다 해독할 실력이 되나요^^

가을이 깊을 때 꼭 다시 가 볼 것을 꿈꾸며.......

 

몸을 바람난간에 의지하니 무한강산(無限江山)이 발 아래로 다투어 달리고.

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니 넓고 넓은 건곤(乾坤)이 가슴속으로 거두어들어오니 가람의 승경(勝景)이 이와 같음은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