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적요한 공간을 서성이다 휴대폰을 쥐어 든다
배터리의 여분 17%
우리내게도 이런 지침쯤 있더라면
뉘라도 방전되어가는 생을 충전시킬 알맞은 콘센트를 모색치않으랴
낙타가 나풀나풀 산맥을 넘는 시간
나비가 찰박찰박 바다를 걷는 시간
당나귀가 타박타박 사막을 건너는 시간
문득, 봉인된 시간에 멀미가 일다
그 밤,
어렴풋이 바다를 보았으나 하늘과 같은 먹빛이었으므로
새앙쥐 눈을 뜨는 바다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삐 풀린 바람만이 광인처럼 떠도는 창 너머론
낮 동안 흘린 이야기들만 바람에 시달리고
내 와디에도 푸석한 바람이 인다
누가 있어 내게 따뜻한 말 한 마디로 마른 가슴 축여주랴
그걸 바란 날들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제 난 그들의 마른 길이어도 족하고
샘을 찾는 이들에겐 감춰 둔 샘을 기꺼이 열어 보이는 자로 남으리
벽시계의 초침소리는 사열하는 병정들의 발걸음 소리마냥 차박차박 새벽을 뚫고 걸어 나온다
기어코 잠은 균열하여 산산이 흩어진다
꿈이 무너진 자리에는
머잖아 짧은 햇귀와 첫 새들의 지껄임 갈마들 터
그러니 널 다시 주워담진 않을란다
잠시 창을 여니
아직 실눈조차 뜨지 못한 미명의 어둔 옷자락 야윈 가지끝에 너풀대고
온기를 찾던 섣달 바람 한 줄기만 무단 침입하는 밤
날이 밝기를 몹시 기다리나
해쓱한 얼굴의 달은 서산을 넘을 기색도 없이 중천에서 무심하다.